인물· 장소

남농기념관에서 남종화의 진수를 보다.

노량진김삿갓 2017. 12. 3. 06:48
남농기념관에서 남종화의 진수를 보다.|8기 회원방
이근술||조회 319|추천 0|2011.07.30. 22:40http://cafe.daum.net/ddguide/Mj22/141 

 

 

 

 남농기념관 표지석 ~ 예서로 쓰인 글씨인데 서울대교수를 지냈던 일중 김충현의 글씨다. 고려대교수였던 동생 여초 김응현(작고)과 함께 당대의 국필로 불렸을 정도다.

 남농의 동상과 산수석 그리고 어디서 옮겨 온 것인지 알수 없는 탑. 네 사자가 받치고 있는 5층탑이다.

 남농기념관 앞에 있는 배롱나무. 수령이 4백년을 넘었다고 한다. 

 남농기념관 전경. 뒤늦게 들어가는 조미숙님과 최영아님의 뒷모습. 왼편의 비는 시인인 목포대 국문학과 허형만교수가 짓고 서희환씨가 썼다. 서희환은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 한글로는 최초로 대통령상을 받았다.(아래의 사진은 그 내용이다) 

 남농기념관 안에서의 김은정실장님의 설명이 잠시 있었다. 

 

 남농의 대표작 낙지론. 그림이 왼편으로 치우치게 그려졌고 그 무게의 치우침을 화제로 균형을 유지한 것이 특징이다. 낙지론은 중장통이 쓴 것으로 사람이 좋은 밭과 넓은 집에 살되 산을 뒤로 하고 시냇물은 앞에 흘러야 한다. 연못이 띠 두른듯 둘러있고 남새밭은 앞에 대나무 숲은 뒤에두어야 한다. 시종이 많아서 사체의 수고로움을 덜고, 누정에 올라 시문을 즐기다 심심하면 날아가는 기러기를 쏘고, 제삿날이면 소를 잡아 온 동네사람들을 대접한다. 사람들이 대소사를 나와 의논해 처리하고 수령방백이 부임과 이임인사를 오며 명절이면 제주를 보내오고...... 이런 삶이라면 누가 제왕의 문하에 들어가 벼슬함을 부러워 하랴. 대충 이런 뜻입니다. 자세히 알고 싶으신 분은 고문진보(古文眞寶) 를 읽으시면 좋을 듯......

 남농이 사용한 문방사우와 낙관을 할 때 썼던 전각.  

서울대 교수였던 한국화가 일랑 이종상화백의 작품. 초의선사와 남농의 조부인 소치 허련 선생이 그림을 펼쳐 보고 있는 장면을 그린 추상화다. 이종상 선생은 현재 통용 되고 있는 5천원권과 5만원권을 그린 분으로 보성군 벌교읍에 위치한 조정래 대하소설 태백산맥 문학관에 길이 81m, 높이 8m의 세계 최대의 건식옹석벽화 "백두대간의 염원"이라는 작품을 두었다.

 글씨와 남종화 모두에 능했던 의재 허백련선생의 글씨 "광풍제월" 비 갠 뒤의 맑고 깨끗한 바람과 달빛을 이름이다. 송나라 때 명필 황정견이 주무숙의 인물됨을 표현한 "흉회쇄락 여광풍제월"에 나오는 말이다. 저 소쇄원의 광풍각과 제월당의 당호도 여기서 비롯된 것이기에 다들 쉽게 이해 했었다.

진지한 표정들......

서예 5체(해서,행서, 초서, 예서, 전서)와 한국화까지 모두에 능했던 소전 손재형의 작품. 산을 크게 쓰고 달은 작게 그린 뒤 화제를 산고월소(山高月小)라 쓰고 전취작(筌醉作)~소전이 취해서 쓴 작품~ 이라고 낙관한 해학이 재미있다. 소전 손재형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이 가져간 저 유명한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歲寒圖)를 한달 여 동안 날마다 찾아가 통사정을 해 찾아온 분이다.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는 용인에 있는 삼성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다. 

 시중유화화중유시(詩中有畵畵中有詩)~시 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 가운데 시가 있다. 곧 "시가 그림이고 그림이 시다"는 뜻일 것이다.  예서로 쓴 소전의 글씨인데 같이 겹치는 글자를 각각 달리 쓴 멋이 가득 든 작품이다. 

 남농기념관을 나서면서 찍은 사진이다. 성급히 자리를 뜬 사람들은 함께하지 못했다.

 세 미녀들이 남농기념관을 배경으로 섰다. 뒤로 보이는 구름이 한가롭다.

 

내가 종일 삼백여장을 찍었는데, 그 중 내 얼굴이 들어간 유일한 사진이다. 김은주 선생님이 팔짱을 껴 주셔서 행복한 시간이었다. 찰라였지만.......ㅎ  여자 사이에 남자가 있으니 글자로 치면 사내 농락할 묘 자다. 반대로 남성 가운데 여성이 있으면 여자 희롱할 묘가 된다. 이 사진을 찍느라고 사진사까지 1남 3녀는 일행과 떨어졌고, 급기야 4차선 대로를 무단 횡단해 해양박물관으로 합류했었다.~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