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하게 흐르는 물줄기처럼 마음속에도 천천히 부드럽게 흘러가는 편안함이 있다면 바로 그것이 행복이다. 행복은 누구나 말을 하듯이 멀리 있는 게 아니다. 가까이 아주 가까이 내가 미처 깨닫지 못하는 속에 존재하는 것이다.
지난 5년간 겨울이면 강화나들길을 걸으면서 선 듯 나서지 못했던 평화나들길을 찾아 나선다. 아주 가까이 내가 미처 깨닫지 못한 행복을 길 위에서 찾기 위해 평화나들길 시작점인 대명항으로 향한다.
김포시의 유일한 항구로 어판장에서 꽃게, 대하, 주꾸미, 농어, 숭어를 비롯해 김장용 새우젓, 멸치젓 등을 살 수 있으며 주변 횟집에서는 싱싱한 회를 즐길 수 있는 대명항을 들머리로 시작되는 평화누리길 1코스 염하강철책길은 평화누리길 시작점으로 바다 건너 강화도를 바라보며 덕포진과 부래도, 염하강을 따라 철책길을 걷는 길이다. 대명항에서 평화누리길 시작에 앞서 김포 함상공원이 마중나온다.
김포 함상공원은 52년간 바다를 지켜오다 2006년 12월 퇴역한 상륙함(운봉함)을 활용하여 조성한 수도권 유일의 함상공원으로 다양한 전시품 감상 및 함상 체험활동을 할 수 있다.
견학로를 따라 함내를 구경하고 이어 함상으로 오른다.
강화해협이다. 인천광역시 강화군(강화도)과 경기도 김포시 사이에 있는 남북 방향의 좁은 해협이다. 마치 강과 같다 하여 염하라고 부르며 강화해협 또는 김포강화해협이라고도 한다. 폭이 좁은 곳은 200~300m, 넓은 곳은 1km 정도이고, 길이는 약 20km이다. 염하는 예로부터 우리나라 해상교통의 요충지로, 조선시대에 삼남지방에서 서해를 북상해 온 세곡선이 염하를 통해 한강으로 진입하여 한양으로 들어갔다. 염하는 교통의 요지였을 뿐 아니라 오랜 세월 동안 외세를 막는 군사적 요충지였는데 개항기 때에는 병인양요(1866년)와 신미양요(1871년)를 치른 격전지였다. 염하는 한국전쟁 전까지만 해도 북한 신의주까지 오가던 뱃길이었는데 전쟁 후 뱃길이 봉쇄되었다가 2007년부터 민간어선이 다닐 수 있게 되었다. 염하를 가로질러 강화대교와 초지대교가 놓여 있다.
평화누리길의 시작인 1코스 염하강철책길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일반인의 출입이 제한되었었다. 이곳 철책은 간첩의 침투를 막기 위해 한국전쟁 이후 설치한 것이다. 그리고 인근에 주둔한 해병대의 군 순찰로 이용됐을 뿐 일반인에게는 문이 열리지 않았다. 그러던 것이 시와 군부대의 지속적 협의로 드디어 빗장을 풀게 되면서 차디찬 철책선에 가려져 60년 가까이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았던 이곳의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보고 느끼며 걸을 수 있게 되었다.
평화누리길 1코스 염하강철책길 시작점이다.
바다와 육지를 가르는 경계, 분단의 아픔을 실감할 수 있는 철책선이 평화누리길의 시작이다.
2011 마을미술 프로젝트 –꿈꾸는 염하강이 잠시 발걸음 멈추게 한다. 2011 마을미술 프로젝트는 문화체육관광부가 주체하고 2011 마을미술 프로젝트 추진위원회 및 김포시가 주관하는 생활공간 공공미술로 가꾸기 사업이다.
꿈꾸는 염하강은 2011마을미술푸로젝트 공모당선작으로 평화의 메시지가 주제이며 영하강이 품고 있는 역사와 평화에 대한 염원을 담아 염하당변 평화누리길에 20여점의 공공미술 작품을 설치하였습니다.
덕포진이다. 사적 제292호인 덕포진은 강화만을 거쳐 서울로 진입하는 길목인 손돌목에 천혜의 지형을 이용해 설치한 조선시대의 군영 덕포진은 신미양요와 병인 양요 대 서구 열강과 치열하게 싸웠던 격전지로 역사적 가치와 유물사적 의의를 가진 곳이다.
추억의 말타기, 예전에 우리들 어릴쩍에 많이 했던 놀이중에 하나다. 술래잡기, 도독놈 잡기, 진돌이, 구술치기, 잣치기, 6.25 전쟁 후에는 병정놀이도 참 많이 했었지....
덕포진은 1981년 전 문화원장 김기승씨가 시비를 들여 발굴이 시작되었다. 현재는 포대와 파수터가 복원되었고 2007년 새 단장한 덕포진 유물전시관에는 조선 후기 사용했던 포의 위치와 포의 유효거리 등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덕포진 파수청터가 마중나온다. 이 유적지는 1980년 덕포진 발굴 조사에서 발견된 건물터이다. 건물의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추정되며, 맛담을 쌀 듯이 둘러친 석벽이 있었다. 발굴 당시 7개의 포탄과 조선시대의 화패인 상평통보 2개가 출토되었으며 건물터 안에는 주춧돌과 화덕이 발견되었다. 이 건물은 포대와 돈대의 중심부에 위치하여 포를 쏠 때 필요한 불싸를 보관하는 장소인 동시에 포병을 지휘하던 장대로 생각된다.
파수청 터는 역사적, 군사적으로 중요한 관방 시설인 덕포진이 세상의 빛을 보게 된 것은 김기송옹(현 김포시 문화관광해설사)의 의지와 사명감에서였다고 한다. 그는 손돌공의 진혼제를 지내던 중 ‘덕포진 포대’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촌로들의 고증과 주변조사를 실시하던 중, 1980년부터 정부의 본격적인 발굴과 복원공사를 통해 묻혀 있던 ‘파수청’도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손돌묘다. 덕포진 북쪽 해안 언덕에 위치한 고려 시대의 뱃사공 손돌의 무덤이다. 김포시와 강화군 사이에 있는 손돌목이라는 여울에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온다. 고려 때 뱃사공 손돌이 몽골군에 쫓겨 강화도로 피신하는 고려왕을 모시게 되었다. 손돌은 바가지 하나를 물에 띄우고, 그 바가지를 따라갈 것을 간언하나, 자신을 함정에 빠뜨리는 것으로 오해한 왕에게 참수를 당한다. 죽은 손돌의 혼을 위로하기 위해 손돌의 묘를 만들고 제사를 드렸다. 손돌이 억울하게 죽은 곳이라 손돌목이라 부른다. 음력 10월 20일쯤 오는 추위를 죽은 손돌의 원혼이 바람과 추위를 몰고 온다고 하여, ‘손돌바람’과 ‘손돌추위’라고 한다.
원례 이곳에는 손돌을 모시던 사당이 있어 제를 올렸으나 일제강점기에 사당이 헐리고 제사도 중단되었다. 그후 1970년에 주민들이 손돌 묘를 세우고 다시 제를 지내기 시작하였다. 1989년부트는 김포문화원의 주관으로 손돌의 기일인 음력 10월 20일에 진혼제를 지내고 있다.
손돌묘에서 보는 염하 건너 강화도에 위치한 손돌목돈대와 용두돈대다. 손돌목돈대는 1679년 축조된 평면이 원형인 돈대이다. 광성돈대에서 용두돈대 못 미쳐 언덕 정상부에 위치하고 있다. 출입구는 서쪽에 있으며 포좌 3기는 동남쪽을 향하고 있다. 본래 중앙에 3칸의 무기고가 있었다. 신미양요 당시 미군이 이곳 손돌목돈대에서 찍은 처참한 사진이 남아있다. 1977년에 복원되었다. 동쪽으로 내려다보이는 곳에 용두돈대가 있는데, 그 앞이 폭이 좁은 물목 손돌목이다. 그리고 용두돈대는 광성보에 소속되어 있으며 해협을 따라 용머리처럼 돌출한 자연 암반 위에 만들어진 돈대이다. 외성에서 약 100m의 통로로 연결되어 있다. 19세기 말 외국 함대와 벌인 전투로 성벽이 파괴되었다가, 1977년 강화 국방유적 정화사업 때 복원되었다. 그때 돈대 안에 ‘강화전적지정화기념 비’를 세웠는데, 앞면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글씨, 뒷면에는 이은상이 짓고 김충현이 글씨 쓴 비문이 있다. 돈대 앞이 손돌목이다.
덕포진을 뒤로 고즈넉한 산길은 철책길에서 보는 또 하나의 힐링 도보여행이다.
철새들이 한차례 쉬어가는 넓은 들녘 풍경이다.
잘 정돈되 계단길을 넘어서면 신안리 마을로 접어든다.
신안리는 김포 명가 한옥마을이 지금 사랑받고 있는 곳이다. 20여 년 전부터 예쁜 전원주택이 숲속에 자리잡은 아늑하고, 편안한 곳, 산과 바다가 어우러져 아름다운 곳이란다.
철망사이도 부래도가 반긴다. 대곶면에 위치하고 있는 섬으로 염하를 따라 한강물에 떠내려 왔다고 하여 부래도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섬 안의 산에는 성터도 남아있으며, 부락산 · 부렴 · 부렴산 · 부렴섬 등이 부래도의 다른 이름들이다.
덕포포구가 내려다 보인다. 덕포포구는 염하 부래도 안 쪽에 있던 포구입니다. ‘지덕이 좋아 선박과 사람이 며여든다’는 뜻이라고도 하고,‘가파른 언덕이 있는 포구.라는 뜻이라고도 한다. 상신리마을 이름을 따서 상신포라고도 했고, 신덕포로도 불렸다. 예로부터 몇몇 주민들이 어업에 종사하는 갖은 포구마을로, 일제강점기에는 5가구 15명 정도의 어민이 두 척의 배로 고기잡이를 하였고 주로 숭어가 많이 잡혔다고 한다. 잡은 숭어는 오라니장에 내다 팔았는데 오라니장은 당시 김포군의 3대 시장 중에 하나이자 가장 큰 시장이었다고 한다. 덕포는 나루이기도 하지만, 덕포진이라는 군사시설이 있는 중요한 곳이다. 1842년(현종8년) 강화 교동도에 있는 경기, 황해 충청의 수근을 다스리는 통어영 소속의 부대가 이곳에서 첨사 아래 3명의 군관과 316명의 수군, 38명의 병졸(육군)들이 덕포진을 지미고 있었다고 한다. 병선은 6척이나 가지고 있을 정도로 배대는 포구가 상당히 크다.
신안리 마을풍경이다.
덕포포구에는 40여 년 전 경작지로 간척하기 전까지는 마을 안 쪽까지 배가 들어왔었다고 한다. 약 7가구 10여 명의 어민이 7척의 돛배로 까나리, 새우, 웅어 등을 잡았던 것이 마을 사람의 마지막 기억이다. 현재에는 원래의 덕포 위치에서 북쪽으로 약 200여 미터 올라간 지점의 군사지역 안에서 제한적으로 어로활동이 이어지고 있다.
덕포 북쪽 해안을 따라 약 1km 지점에는 바삭바위나무랄 불리는 작은 나무가 있다. 1919년의 지도를 보면 이곳은 강화의 광성나루를 오가기 위한 나였였다고 한다. 이곳에는 바위에서 약수가 나오는 샘물이 있는데 만조 때는 바다에 잠겼다가 간조 때 드러나는 신기한 우물로 피부병에 좋다고하여 인근 주민들이 많이 이용하였다고 한다.
한가로운 농촌마을 풍경이 아름답다.
출렁다리다.
한차례 살짝 올라서면 전망쉼터다.
강화해협이다. 인천광역시 강화군(강화도)과 경기도 김포시 사이에 있는 남북 방향의 좁은 해협이다. 마치 강과 같다 하여 염하라고 부르며 강화해협, 염하는 예로부터 우리나라 해상교통의 요충지로, 조선시대에 삼남지방에서 서해를 북상해 온 세곡선이 염하를 통해 한강으로 진입하여 한양으로 들어갔다. 염하는 교통의 요지였을 뿐 아니라 오랜 세월 동안 외세를 막는 군사적 요충지였는데 개항기 때에는 병인양요(1866년)와 신미양요(1871년)를 치른 격전지였다. 염하는 한국전쟁 전까지만 해도 북한 신의주까지 오가던 뱃길이었는데 전쟁 후 뱃길이 봉쇄되었다가 2007년부터 민간어선이 다닐 수 있게 되었다.
어느새 봄에 들어선다는 우수다. 이때쯤이면 꽃샘추위가 잠시 기승을 부리지만 “우수 경칩에 대동강 풀린다.”는 속담이 있듯이 우수와 경칩을 지나면 아무리 춥던 날씨도 누그러져 봄기운이 돌고 초목이 싹트기 시작한다. 바닷바람에 겨울내내 추위와 싸우던 나목들이 봄을 기다리고 있다.
고양초는 충남 부여군 부여읍 부소산 백마강 가의 고란사 뒤의 절벽에서 자라기 때문에 고란초라는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앞 뒤에 노란포자가 원형으로 두 줄이 있으며, 세찬 강바람과 눈보라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바위틈에서 푸른 꽃을 피우듯이 사시사철 자란다고 한다. 고란초를 확인은 못했지만 화려함도 없고 향기도 없는 염하강 고란초는 생활에 지치고 힘든 사람들에게. "결코포기하지 말고 꿋꿋하게 걸어라라고" 무엇의 소리로 전하고 있단다.
계단길을 넘어서면....
강화나들길 호국돈대길의 만났던 두 송전탑이 반갑다.
염하강 전망대에서 잠시 다리쉼을 한다.
쇄암리전망대 쉼터다.
유일하게 1코스 염하강철책길에서 버스를 이용할 수 있는 곳이다. 아마 이곳도 가물에 콩나듯이 버스를 만날 수 있겠지....
석천천이다. 대곶면 쇄암리에서 시작하여 월곶면 고양리에서 서해로 유입되는 지방하천이다. 하천연장은 2.1km, 유로연장 3km, 유역면적 4.39㎢이다. 하천연안을 따라 경지정리가 완료된 농경지가 넓게 분포하고 있다. 하상경사는 완만한 편이다.
벽화길이다.
2013년 8월 Peace People 평화를 사랑하는 김포 시민들의 표정을 염화강변에 담았다고 한다.
해안에서 지난 강추위에 얼었던 얼음(유빙)들이 갯벌에 널려있다.
1코스의 유일한 매점인 할머니 매점이다.
인천해양경찰서 원머루대행신고소다.
1코스 염하강철책길에서 보는 식당인 정육마트식장이다.
원모루(원머루)나루다. 원머루는 ‘높은 언덕’이라는 뜻으로 한자로는 고양포다. 지금도 어업이 이어지고 있는 김포의 몇 안 되는 포구 중 하나로 원포라고도 한다. 조선시대 말까지 주로 새우를 잡아 파는 작은 포구마을이었다. 부근에는 원주막이라는 이름의 주막도 있었으며 일 년 중 첫 출어하는 정월에는 마을 뒷산의 당목에서 안녕과 풍어를 기원하는 용왕제를 지내고 했다. 1895년의 지도에는 뱃길이 보이지 않다가 1919년의 지도를 보면 강화 화도돈대 아래쪽으로 이어지는 뱃길을 확인할 수 있다. 처음에는 주로 포구의 역할을 하다가 점차 강화를 오가는 나루의 역할도 했음을 할 수 있는 부분이다. 일제강점기에는 나루 주변에 공출 창고와 가마니 창고를 두고 쌀을 약탈하여 일본으로 실어가던 아픈 역사의 장소이기도 하다. 근대기에는 기선이 정기적으로 정박하게 되면서 마을의 규모가 커졌는데 마을이 번성하였을 대는 가구 수가 140여 호에 이르렀다고 한다. 원래 나루의 위치는 현재의 원모루나루에서 남쪽으로 조금 내려온, 마을길이 끝나는 지점에 있었다. 마을 사람 중에 이곳에 기선의 표를 팔던 매표소가 있었던 것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옛날부터 이곳 고양리에 강화와 인천을 왕래하던 포구가 있던 곳으로 '고양포', 또는 '원모루나루'라고 불려왔다.
김포CC를 만난다. 산과 강 그리고 바다의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는, 김포 SEASIDE 컨트리클럽은 해변골프장의 특색과 함께 18홀 18색의 묘미를 갖추도록 하였으며, 코스의 공략에 있어서도 생각하는 파 플레이와 타수를 줄일 수 있는 선물과 실수를 하게 되면 당연히 벌 타가 주어지는 전략형 코스로 설계되어 에버리지 골퍼들이 도전과 쾌감을 맛볼 수 있도록 만들어진 정통 해변 골프장이다.
염하강 전망대에서 보는 염하 그리고 강화나들길 2코스 호국돈대길이 반갑다. 지난 11월부터 시작한 강화나들길이 이제 막바지로 접어들었다. 강화도의 호국돈대길은 오래전부터 나라의 안전을 지켜 주던 소중한 터전이자 외국의 문화가 바닷길을 통해 육지로 들고 나던 관문이었다. 남과 북의 강이 함께 모여 흐르는 바다를 따라 걷다 보면, 외국과의 충돌에 대비하기 위해 섬을 빙 둘러 만든 53개의 돈대를 만나게 됩니다. 몽골과의 항쟁에서부터 조선조 말 병인양요, 신미양요에 이르는 민족의 자긍심과 국난 극복의 의지가 서린 강화도의 전적지를 살펴보는 길이다.
포내배수펌프장을 통과한다.
이제 문수산이 손에 잡힐 듯하다. 1코스의 종점이자 2코스의 시작점인 문수산성은 해발 376m 문수산의 험준한 줄기에서 해안지대를 연결한 테뫼식 석축산성으로, 현재 해안 쪽의 성벽과 문루는 없어지고 산등성이를 연결한 성곽만 남아 있다. 명칭은 산내에 있는 문수사에서 유래하였다. 이 성은 갑곶진과 더불어 강화 입구를 지키는 성으로, 1694년(숙종 20)에 축성되었고 1812년(순조 12)에는 대대적으로 중수되었는데, 다듬은 돌로 견고하게 쌓았고 그 위에 여장을 둘렀다. 당시 성문은 취예루·공해루 등 3개의 문루와 3개의 암문이 있었다. 이 가운데 취예루는 갑곶진과 마주보는 해안에 있었으며 강화에서 육지로 나오는 관문 구실을 하였다.
문수산성은 1866년(고종 3)의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과 치열한 격전을 치른 곳으로 특히 유명하다. 당시 흥선대원군의 천주교 탄압에 의해 프랑스 선교사들이 희생을 당하자 이에 대한 보복으로 중국에 주둔하고 있던 프랑스함대사령관 로즈 제독이 10월 11일 군함 7척, 대포 10문, 병력 1천을 거느리고 조선에 침입하여 10월 16일 강화부를 점령하였다. 이에 조선에서는 순무영을 설치하고 양헌수를 천총에 임명하여 강화도를 수복케 하였으나, 26일에 벌어진 문수산성전투에서 프랑스군이 가진 총포의 위력을 당해낼 수 없어 패배하고 말았으며, 이때 해안 쪽의 성벽과 문루가 모두 파괴되었다.
문수산성 남문이다. 이제 1코스 염하강철책길이 끝나는 순간이다.
"길 위에서 찾는 행복" 평화누리길 1코스 염하강철책길에서 또 하나의 추억거리를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