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의 문턱을 넘어선 바람은 혼자 오는 법이 없습니다. 뒷산을 휘돌아 바스락대는 참나무 잎을 이끌고 포부당당 들어섭니다. 마당은 금세 낙엽 이불로 덮여 숲길 한 자락 옮겨 놓은 것처럼 갈색 톤으로 바뀝니다.
낙엽을 태우면 갓 볶은 커피 향과 잘 익은 개암 냄새가 난다고 하는데, 요즘처럼 건조한 날씨에 불을 놓을 수는 없지요. 수북하게 쌓이는 낙엽은 이따금 쓸어 모아 산으로 돌려보냅니다.
제가 왔던 곳으로 돌아가는 그들은 저를 키워준 땅에 거름이 되어 또 다른 생명을 키워냅니다. 사라지는 것처럼 보여도 실은 그 안에 담겨있듯, 한 해의 끝자락은 새로운 시작과도 같습니다.
동지가 들어있는 12월이면 팥으로 만든 음식이 입맛을 당깁니다. 팥밥, 팥죽, 팥떡, 팥빵 등 여러 음식 중에, 호박고지를 넣어 만든 팥고물떡은 떠올리기만 해도 침이 고입니다. 가을에 거둔 팥은 타작을 해서 선별해놓고, 늙은 호박을 말려 호박고지를 장만해두면 떡 만들 재료는 넉넉히 갖춰집니다.
팥고물 호박고지 떡의 감칠맛은 포슬포슬한 팥고물과 달고 꼬들꼬들한 호박고지가 빚어냅니다. 늙은 호박을 햇볕에 말리면 생 호박보다 몇 배로 달콤하고 영양분이 응축되어 맛이 진합니다.
애호박은 거두는 대로 말려야 하지만 늙은 호박은 서리 내리기 전에 거두었더라도 얼지 않게 보관했다가 늦가을 이후에 말리는 것이 좋습니다. 살짝 얼었다 녹으면서 마르면 당도는 더 높아지고, 이렇게 말리면 해가 바뀌어도 여간해서는 벌레가 나지 않습니다.
늙은 호박을 말리려면 껍질을 벗기고 속을 긁어내 옆으로 빙빙 돌아가며 길게 오려냅니다. 그래야 줄에 걸쳐 널기 좋은데, 빨래건조대를 이용하면 많은 양을 가지런히 말릴 수 있습니다.
이슬을 맞지 않게 저녁이면 비닐을 덮어놓았다가 다음날 햇볕이 들면 걷어줍니다. 날씨가 혹독하게 추운 것 같아도 바람만 잠잠하면 한낮 햇살은 퍽이나 포근합니다. 바람이 적당히 불면 호박 말리기는 더 좋습니다.
겨울이라고 해서 항상 눈이 많이 내리는 것은 아닌데, 몇 해 전에는 하룻밤 사이에 눈이 한 뼘 가까이 내렸던 적이 있었습니다. 눈이 내린 날은 포근하지요.
눈 녹듯 사라진다는 말처럼 한낮이 되니 호박고지 덮개에 쌓였던 눈도 말끔히 사라졌습니다.
비닐을 걷어내자 새하얀 들녘을 배경으로 빛을 발하는 주홍색깔의 호박고지 자태가 어찌나 화려하고 곱던지 넋이 나갈 지경이었습니다. 과육이 단단한 늙은 호박으로 만든 호박고지는 색과 맛이 이렇듯 진합니다.
팥과 호박고지가 준비되면 쌀을 불리고 팥은 삶아서 고물을 만듭니다. 현미는 이틀 동안, 백미는 하루 정도 물에 불려서 씻어 건진 후 물기를 빼고 분쇄기에 곱게 갈아줍니다. 딱딱한 팥은 압력솥에 삶으면 간편합니다.
팥은 밥을 짓든 떡을 찌든, 떫은맛이 나는 성분이 제거되도록 한 번 삶아서 첫 물은 버리고 다시 물을 부어 삶아야 합니다. 30분 남짓 삶아서 맨 위에 팥알을 손으로 문질러보거나 맛을 봐서 폭신하게 익었는지 확인하고, 조금이라도 덜 익었으면 위아래 뒤적인 후 물을 약간 붓고 약불에서 조금만 더 익혀줍니다.
팥은 푹 익고 국물이 알맞게 졸아들어야 식었을 때 고슬고슬한 고물이 됩니다. 너무 물러지지 않게 주의하고,
물이 약간 남으면 좀 더 열을 가해 물기를 날려줍니다.
물기가 지나치게 많거나 팥이 심하게 물러지면 앙금처럼 되어버립니다. 이렇게 변하면 떡이나 빵에 소를 넣을 수는 있어도 떡고물로 쓰기는 적당치 않습니다.
알맞게 익힌 팥고물은 보송보송해지도록 쟁반에 펼쳐 식히고 호박고지는 물에 불립니다. 호박고지만으로도 충분한 맛이 나는데, 단맛이 적은 호박고지는 불리는 물에 황설탕과 소금을 약간 풀어주어도 됩니다.
떡 만들기 중요한 과정 중의 하나가 '물 내리기'입니다. 반죽물은 쌀가루 수분에 따라 다르므로 팔팔 끓인 물을 조금씩 넣어가며 손으로 비벼줍니다. 불린 쌀을 가정용 분쇄기에 갈면 식감도 좋고 소화도 잘되는 반면, 물을 축이면 고운 체는 통과하기가 어렵습니다.
쌀가루에 수분이 충분히 배도록 적당한 시간을 두면 체에 내리기도 쉽고, 불린 호박고지와 버무릴 때 덩어리지지 않아서 깔끔합니다. 시루나 찜기에 팥고물, 호박고지 버무린 쌀가루, 팥고물 순서로 올리고 분량이 많을 때는 이런 방법으로 켜켜이 안쳐서 찝니다.
팥고물 호박떡은 시루에서 꺼내자마자 손으로 뚝 잘라서 후후 불어가며 먹으면 눈이 사르르 감길 정도로 꿀떡 넘어갑니다. 멥쌀 설기는 따뜻하게 먹어야 맛있지만 호박고지와 버무린 떡은 찰기가 좋아서 식어도 말랑말랑하고, 현미로 인해 뒷맛이 한결 구수합니다.
팥고물 호박떡을 좀 더 간편하게 만드는 방법도 있습니다.
잘게 썬 호박고지를 찹쌀•멥쌀에 섞어 푹 퍼지게 밥을 짓고, 적당히 으깬 후 한 입 크기로 둥글려서 팥고물에 묻힙니다. 호박고지의 꼬들꼬들한 맛은 떡이 낫지만 간식이나 아침밥 대신하기는 밥떡도 좋습니다.
그럼 첫눈을 기다리며 팥고물 호박떡을 맛있게 만들어 보세요.
팥고물 호박고지 떡
[재료준비]
- 불려서 빻은 현미멥쌀가루 300g
- 소금 1작은술
- 물 3~4큰술
- 늙은 호박고지 140g
- 호박고지 불리는 물 300cc
*팥고물 : 검정팥(또는 붉은팥) 2컵, 물 4~5컵, 소금 1작은술, 황설탕 6큰술
[만드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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